biography
도전과 응전
화가 김승연 약전(略傳)
「 탄생과 유년기의 병마 」
김승연은 1955년 (음력 구월 초하루 자시)에 서울 동작구(구, 영등포구) 상도동의 2층 적산가옥에서 태어난다. 그는 부친 김수원(김지신, 김헌경)과 모친(유영희) 사이의 2남 2녀중 차남이다. 친조부 김원홍은 황해도 봉산의 만석꾼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 초대 기천면장을 지냈다. 당시로는 드문 개혁사상을 품은 진취적인 인물로 슬하에 4녀 1남을 두었다. 부친 김수원은 5대 독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글과 그림에 재능을 드러내고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하는 등 예술 취향을 드러낸다. 그 뒤 김수원은 사리원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과 연을 맺고 황해도 청년연락부장을 지내다가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가서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교편생활을 하다가 육사 8기로 군대 조직에 뛰어든다. 육사를 졸업하고 장래가 촉망받는 장교로 근무하다가 예편하고 이른 나이에 얻은 지병으로 세상을 뜬다. 모친 유영희는 충남 서산군 기천면에서 아흔 아홉 칸 집을 소유한 서령 유씨 집안의 2녀 중 차녀로 태어난다. 일제 강점기 때 인천여고를 졸업하고, 해방과 함께 체신교통부 공채 1호 공무원으로 일한다. 현재 모친은 아흔 다섯 살로 생존해 있다.
그림그리기를 즐겨한 소년 김승연은 사물묘사에 심취해 화가들의 작품을 똑같이 모사하는데 빼어난 솜씨를 보여 사람들을 놀래키곤 했다. 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던 여선생은 르동화집에 실린 꽃과 화병을 주제로 한 정물화 두 점을 모사한 것에 감탄하며 교실 뒤 벽면에 게시하기도 했다. 그는 책, 노트, 벽면 등의 빈 공간에 그림 그리기를 즐겨 했는데, 병약함으로 야외활동을 못하는 통에 실내에서 그림 그리기에 더 빠져들었다. 김승연은 상급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여전히 병약하여 힘든 학창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의 유일한 도락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미술부에 들어 활동하며 재능을 드러낸다.
누님의 배려로 미술 렛슨을 받으며 미술대학 진학의 꿈을 키운다. 십대 중반 한기주(한지작가, 전 강릉대 교수)의 문하에서 사사하는 동안 그의 미적 감수성은 한층 더 풍부해진다. 하지만 열여덟 살 때 어려서 앓던 지병이 도져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혼수상태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의 병명은 뇌 질병이었다. 주치의의 결단으로 뇌수술을 받는 대신 방사선 치료를 받은 뒤 병을 떨치고 새로운 삶의 계기를 맞는다. 모친은 종종 그를 앞에 두고 “너는 죽을 고비를 다섯 번이나 넘겼다.”라고 회상하곤 했다.
그는 병원 퇴원 뒤에 뇌 질병의 후유증으로 기억상실증을 앓는다. 게다가 혼자서는 보행이 힘들고, 용변을 가릴 수도 없는 처지이며, 언어장애와 눈의 초점이 잡히지 않아 사물을 겨우 식별하는 정도의 약시 상태였다. 이래저래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절망을 안고 막연하게 죽음을 떠올리곤 했다. 다행히 꾸준한 치료를 받고 재활에 성공하며 기초체력과 학습능력을 되찾고, 미술대학 입학에의 꿈도 다시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병마의 긴 터널을 헤치고 나와 미술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 대학시절의 혼돈기 」
김승연이 대학에 진학한 뒤 오랜 병력으로 기초 군사훈련과 병역 면제를 받으며 그림에 정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은 것은 그나마 행운이다. 그는 미술대학 시절 다양한 시각 조형을 표출하는 실험들, 즉 풍경, 정물, 누드, 반추상. 구성주의, 입체파 등을 두루 섭렵하며 지표도 없는 작업에 몰두한다.
날이 갈수록 그림에의 열망은 커지고, 서울 명동의 달러골목에 늘어 선 외서책방에서 구입한 Art in America(미술잡지)를 뒤적이며, 혼자 은밀하게 서구미술을 향한 동경과 미국 유학의 꿈을 키운다. 유학비용에 보태기 위해 그림렛슨에 나서는 한편, 영어 학습에도 꾸준히 애를 쓴다. 당시 한국 미술계에 유행한 단색화, 개념미술, 행위예술 등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는 미술대학 4학년 때 사실주의로 회귀하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찾는데 열정을 바친다.
돌이켜보면, 소재주의에 편승하여 단지 희소성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에 몰입한 것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풋풋한 미술대학 시절, 남이 놓친 새로운 소재를 찾고 독창적인 표현세계를 파고 들던 그와 교류를 하던 화우들은 김일영(조소), 길호관(디자인), 문범(회화), 김한배(조경), 방효성(회화), 마상병(회화), 故이희중(회화), 윤진섭(평론) 등이다. 아울러 그가 좋은 영향을 받은 선배로는 지석철(회화), 김강용(회화) ,이석주(회화), 곽남신(판화) 등을 꼽을 수 있다.
그가 남보다 일찍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조교를 거친 뒤 유학길에 오른 것은 1982년이다. 그의 유학을 가는데 도움을 베푼 친구는 김지미(전,시드니 대학교수)다. 또한 그에게 판화를 전공하라고 권유한 서승원(회화) 지도교수도 미래 진로를 설계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이다.
「 유학시절의 고투와 생존경쟁 」
김승연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뉴욕의 JFK공항에 도착하던 날의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고 생생하다. 태평양 상공을 거쳐 열 몇 시간을 날아온 비행기는 뉴욕의 화려한 야경을 보여주며 공항에 안착하는 순간 그의 가슴에는 미지의 거대한 제국에 입성하는 설렘과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이 세차게 소용돌이친다. 뉴욕에 도착한 주의 주말이 지나자 숨 돌릴 새도 없이 곧바로 대학원 수업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는 영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데다 오랜 투약으로 얻은 이명현상이 걱정거리였다.
유학 초기 대학원 수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잠을 설치곤 한다. 다행히 미국 의사이자 교회목회자를 만나 치료를 받는데, 한 달 만에 이명 증상이 줄고 여섯 달 뒤엔 완치되는 기적을 경험한다. 1983년 한 친척의 소개로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로 유명한 백남준 선생님을 만나고 그 뒤로 소호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눈다.
백남준 선생은 그에게 “김군이 젊은 나이에 뉴욕에 온 것은 행운이야, 한국작가들은 다들 나이가 차서 오거든.”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에 새긴다. 거기에 더해 그에게 화가로서 세 가지 명심할 것을 새기라고 일렀다, 첫째, 남이 흉내내지 못하는 일을 찾아라, 둘째, 남이 했던 것들을 따라하지 말아라, 셋째,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파고 들어라. 이것은 예술가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수칙이지만, 백남준 선생은 “예술가들 대부분 이 세 가지를 자주 망각한다.”고 탄식하듯 말했다. 그는 그 당부를 가슴에 각인하고 평생 화업의 지표로 삼으며 후학을 가르칠 때도 이를 자주 강조한다.
김승연의 작품이 Art Times N.Y에 소개되고, 이를 계기로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W, Broadway의 OK Harris gallery Ivan Karp를 만난다. 그를 만난 계기로 작업 파일을 만들고 세일즈를 시작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에서 첫 작품이 팔리는 기쁨을 누린다. 그를 주목한 한 화상(畫商)은 그에게 학업을 그만두고 작업실을 제공을 할테니 그림만 그리라고 권유했다.
빨리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라는 그의 권유에 자신이 지향하던 화업의 목적과 정체성에 혼돈을 겪으며 흔들렸지만 작업실에 매인 채 그림만 그리는 것은 골방의 노예나 다를 바 없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뉴욕에서 자주 만나던 선배들인 이병용, 이일 같은 재미작가들은 그에게 미술계 장삿꾼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으니 늘 조심하라고 일렀다. 김승연은 유태인 화상의 유혹적인 제안을 뿌리치고 학교를 마치겠다는 제 뜻을 전한다. 그가 뉴욕에 온 것은 단 하나 판화 공부를 바닥까지 파고 드는 것이었다.
그가 극사실주의 회화를 전공으로 하면서 동시에 판화공부에 열심을 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미술학도에게 늘 재료비의 지출은 큰 부담이다. 그 역시 식비를 주 5불로 제한하는 검소한 생활을 이어가며 ‘작가로서 살아남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작품제작에 정진한다. 당시 재미 교포들이 모국에서 유학 온 젊은 화가에게 물심양면의 후원을 베풀었는데, 이는 가난한 유학생활을 버티는데 큰 지지대가 되었다. 그는 그 재미교포들과 지금까지 40년 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가 미국 유학 중에 가르침을 받은 은사들, 즉 Ben Bishop(작고), Maurice Brown, Alex Martin, Sanders, Alex Bohen, Raligh, Ben Wigfall, Joseph Ramos, Carol Wax 등에 대해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기곤 한다. 특히 판화에 본격적으로 진입할 무렵 메조틴트(Mezzotint) 마스터인 Carol Wax의 지도를 받은 것은 그가 훗날 메조틴트 작가로 우뚝 설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김승연은 Carol Wax와의 인연으로 메조틴트라는 세계로 깊이 빠져 듦과 동시에 동판화라는 세계를 섭렵한다. 하지만 메조틴트라는 한 카테고리에 안에서 무언가 이루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붓는 수고와 정진은 지루함을 견디며 초인적인 견딤을 잇는 일이다. 1987년 미국서적 Mezzotint History and Techniques –Abrams Publishing, Co에 그의 메조틴트 작품이 소개되고 그는 나라 안팎에서 메조틴트 작가로 명성을 쌓는다.
귀국 전시회를 통해 나라 안팎에서 전문 판화가로서의 이름을 알리고, 미국화랑과 콜랙터들의 상업 거래에 노출이 되고 미국화랑의 초대전에 빈번하게 나서면서 김승연은 촉망받는 작가로 미국의 저널들에 소개되곤 한다. 그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한편 뉴욕에서의 비싼 생계비를 벌기 위해 뉴욕의 패션회사에서도 쉬지 않고 일을 이어간다
「 교수와 작가로서의 책임과 소명 」
988년 홍익대 미대 학장인 박서보 선생의 뉴욕 방문은 젊은 화가 김승연의 인생에 한 전환점이 되었다. 학창시절 조교를 하며 가깝게 모시던 박서보 선생은 김승연의 뉴욕 작업실에서 판화 근작들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홍익대 미대에 신설된 판화과 교수직을 제안했다. 그는 뉴욕에서 화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고국으로 돌아가 모교 교수로서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잠시 망설였다.
그는 홍익대 미대 교수직 제안을 수락하고 삶의 터전을 서울로 옮긴다. 홍익대에서는 웬일인지 교수 발령을 자꾸 늦추었다. 그는 대학교 교수직을 놓고 벌어지는 추악한 사태를 겪으면서 뉴욕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이를 홍익대 측에 통보한다. 그제서야 홍익대에서 서둘러 교수 발령을 내주었다. 그의 환멸은 교수직 발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홍익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입시 비리가 버젓이 저질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실망과 분노 속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는 애써 해외로 눈을 돌려 판화의 국제성 획득을 교육 목표로 삼고 제자들에게 세계 각지의 국제판화전에 작품을 출품하도록 이끈다. 그 열매는 홍익대 미술대가 미국판화가협회의 해외대학 우수판화과로 선정되는 것에 더해 해외 활동에 나선 제자들 중에서 이미 그를 뛰어넘는 명성을 얻은 이들이 출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제자를 키우는 일 말고도 국제전에 쉬지 않고 작품을 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끌어낸다.
1983년 류블랴나 국제판화 비엔날레에서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대상)에 이어 차석을 차지하고, 1995년 류블랴나 국제판화 미술관 초대로 프랭크 스텔라와 같이 개인전을 열고 국제판화계에 입지를 다진다. 그해 비엔날레 대상의 수상자는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다. 1999년에는 이태리 비엘라 국제판화 트리엔날에서 단독으로 대상을 거머쥐면서 판화가로서 국제적 명성을 이어간다. 김승연은 2015년까지 15회에 걸쳐 국제전 수상이라는 성과를 잇달아 내며 국제전에서의 명성이 허상이 아니라는 걸 입증한다. 수상 경력이 가장 많이 받은 작가 반열로 올라선다. 국제전에서의 잇단 수상 낭보로 그는 범세계적인 판화작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가장 주목받는 판화화가로 확고한 지위를 쌓기에 이른다. 그는 국제전에 출품된 작품들을 촬영한 수 만 장에 이르는 방대한 슬라이드 자료들을 동시대 현대판화의 위상과 흐름을 후학들에게 가르치는 수업의 핵심으로 삼는다.
김승연이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내내 나쁜 차별과 따돌림, 반목과 모함 속에서 끔찍한 환멸을 겪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 미술계의 타락한 관행 탓이다. 그는 교수 퇴임 전 10여 년 동안 입시비리를 사회에 공표하고자 공개 행보를 펼친다.
그 공개 행보는 대학 내부와 외부의 기득권 비리 세력이 힘을 더해 만든 카르텔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다. 일부 몰염치한 교수들의 집단적인 부패 행위를 묵인하는 타락한 행태, 추악한 카르텔과의 투쟁은 늘 버겁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당백의 신념으로 비리 세력에 꿋꿋하게 맞선다. 그 일을 치르며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몸과 마음이 두루 피폐해진다. 그에 의해 미술대학 입시비리가 공론화될수록 그에게는 신변 위협의 협박이 잇따르지만 부당한 위협이나 윽박지름이 소위 기득권 카르텔에 의해 행해지는 추악한 비리를 허용해서 안 된다는 올바름을 향한 그의 소명의식과 신념을 꺾지는 못한다.
미술계 내부에 잠복한 추악한 관행과의 오랜 싸움으로 인해 그의 망막에 병증이 발생한다. 다행히 안과 수술을 받고 실명 위기를 넘기지만 초사실적인 판화작업에 필요한 시각의 정밀한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난관에 부딪친다. 그에게 홍익대 미술대 교수직은 보람과 즐거움보다는 고난과 환멸의 흔적만을 남기지만 그를 버티게 한 것은 제자들의 열정과 놀라운 예술적 성취들이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판화작가이자 누구보다 올바름을 지켜내고자 헌신했던 미술대학 교수인 김승연, 그는 늘 입버릇처럼 “나이가 들면 나를 넘어선 제자들에게 한수씩 배우면서 살고 싶다. 제자들은 항상 나의 자부심이고, 나의 앞자리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학력
1979/1982
- 홍익대학교 / 대학원 (서양화 전공)
- 미술학사 : B. F. A (Bachelor of Fine Arts, painting)
- 미술석사 : M. F. A (Master of Fine Arts, painting)
1985.5.
- 미국, 뉴욕주립대학 대학원 (서양화 전공)
- 미술석사 : M. F. A (Master of Fine Arts, painting)
1987.5.
- 미국, 뉴욕주립대학 대학원 (판화전공)
- 미술석사 : M. F. A (Master of Fine Arts, printmaking)
교육
1979-1980
- 서울 동서울 상업고등학교 미술교사 재직
1982
-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연구조교 재직
1989-1992
- 홍익대학교 판화과 강사
1989-1990
- 동덕여자 대학교 강사
1990-1992
- 수원대학교 강사
1991-1992
- 목원대 대학원 강사
1991-1995
-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1992-2021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판화과 교수
수상경력
1978.9.
- 제9회 전국대학미전 대통령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78.10.
- 개교 30주년 홍익대학교 최애경 재단이사장 공로상
1992.3.
- 한국미술협회 30주년 기념 ‘오늘의 한국미술특별전’, 우수상 수상, 예술의 전당, 서울
1993.6.
- 제20회 류블랴나(Ljubljana) 국제판화 비엔나레, 1등상 수상, 류블랴나, 슬로베니아
1996.3.
- 제3회 일본 高知 국제판화 트리엔날, 4등상 수상, 고지(高知), 일본
1996.8.
- 제11회 독일 국제판화 트리엔날, 우수상 수상, 후레헨, 독일
1997.2.
- 포틀랜드 국제 판화전, 미술관상 수상, 포틀랜드미술관, 미국
1998.4.
- 제4회 삿뽀로 국제판화 비엔나레, 후원자상 수상, 북해도립근대미술관, 일본
1998.11.
- ’98 아가트 국제판화 훼스티발 우수상 수상, 류블랴나, 슬로베니아
1999.4.
- 제14회 이탈리아 비알라 국제판화 트리엔날, 대상 수상, 비알라, 이탈리아
2000.11.
- 2000 중국, 靑島 국제판화 비엔나레, 銀賞 (2등상 수상), 靑島, 중국
2002.3.
- 제5회 고지 국제판화 트리엔날, 4등상 수상, 고지(高知). 일본
2003.9.
- 2003 북경 국제판화 비엔나레 우수상 수상, 북경, 중국
2003.10.
- 제4회 비톨라 국제판화 트리엔날, 대상 수상, 비톨라, 마케도니아
2007.4.
- 2007 중국 관란 국제판화 비엔나레, 국제판화상 수상, 심천, 중국
2008.9.
- 2008 Edmonton Print International, 미술관상 수상, 알버타미술관, 에드먼턴, 캐나다
2011.6.
- 2011 International mezzotint Festival 전통판화상 수상, 에카테린부르크 미술관, 러시아
2015.12.
- 2015 France Sarcelles International Print Biennial 2등상 수상, 삭쎌, 프랑스
전시기획, 운영위원, 심사위원 및 커미셔너
1996
- 대한민국 미술대전 / 심사위원 (국립현대미술관)
- 아시아 판화미술축제 / 국제코미셔너 (부산광역시)
- 송파미술대전 / 심사위원 (송파구청)
- 한국 청년작가 초대전 / 심사위원 (한국일보사)
- ’96 청소년 실기대회 / 심사위원 (영등포구청)
1997
- ’97 서울미술대전 / 추진위원 (서울특별시)
- 제9회 대전광역시 미술대전 / 심사위원 (대전광역시)
1998
- 1998 제14회 무등미술대전 / 심사위원 (광주직할시)
- ‘CONNECTIONS’ 유펜대학미술관 / 코미셔너
1999
- ‘99 서울미술대전 / 추진위원 (서울특별시)
- 제12회 광주광역시 미술대전 / 심사위원 (광주광역시)
- 1999 무등미술대전 / 운영위원 (광주직할시)
- 제18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2부:구상) / 운영위원
2000
- 제10회 미술세계주최, 뉴-프런티어 공모전 / 심사위원
- 단원미술대전 / 운영위원
- 제16회 무등미술대전 / 심사위원
- Nokia 국제미술대전 / 심사위원
- 서울-공간 국제판화비엔나레 / 심사위원
- 단원미술대전 / 운영위원
- 러시아 국제판화 비엔나레 / 한국 코미셔너 & 심사위원장
- 제19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 운영위원
2001
- 제20회 대한민국미술대전 / 심사위원
- 제1회 송은미술대전 / 심사위원
- 호주, La Trobe University / 박사학위 심사위원
- 제17회 무등미술대전 / 운영위원
- 제13회 대전광역시 미술대전 / 심사위원
2002
- 한국국제판화축제 / 국제코미셔너
- 한국판화진흥회, Belt전 / 심사위원
- 6 Connections / 한국실행위원
- 2002 서울미술대전 / 추진위원
- 제19회 무등미술대전 / 운영위원
- 제12회 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 집행위원회 위원장
- 하나은행주최 실기대회 / 심사위원
2003
- 제19회 무등미술대전 / 운영위원
- 제9회 행주미술대전 / 운영위원
- 한성대학교 예술대전 / 심사위원
- 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 집행위원회 위원장
2004
- 제14회 서울_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 조직위원 집행위원장
2005
- 미국, 훌브라이트 / 장학재단 선정위원
- 서울_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 조직위원 집행위원장
2006
- Prints on the Plate / 기획 · 집행위원장
- 두산 국제판화 페스티발 / 기획위원 국제코미셔너
- 한,일 국제판화의 명상전 / 기획, 코미셔너
- 서울_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 부산 국제 판화제 / 국제코미셔너
- 단원미술제 / 운영위원
- 러시아 국제판화 비엔나레 / 한국 코미셔너
- 서울_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2007
- 동경 국제판화 심포지움, 우에노 국립미술관 / 기조발표
- 제15회 서울-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 부산 국제 판화제 / 국제코미셔너
- 단원미술제 / 운영위원
- 러시아 국제판화 비엔나레 / 한국 코미셔너, 국제심사위원장
2008
- 아시아, 환태평양 국제판화 전 / 심포지움·기조논문 발표
- 무등미술대전 / 운영위원, 심사위원
- 제 19회 대한민국미술대전 / 운영위원, 심사위원
- 러시아 국제판화 비엔나레 / 한국 코미셔너
- 서울_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2009
- 러시아 국제판화비엔나레 / 한국 코미셔너
- 2009 단원미술대전 / 운영위원
- 서울-공간 국제판화비엔나레 /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2010
- 서울-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 러시아 국제판화 비엔나레 / 한국 코미셔너
- The Futurity of Contemporary Printmaking Exhibition / 한국 코미셔너
- 2010 International Symposium and Exhibition, Key note Speaker,Taipei, Taiwan
2011
- 러시아 국제판화비엔날레 / 한국 코미셔너
- 서울-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조직위원회 / 집행위원장
2012
- 서울-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조직위원회 / 집행위원장
- 러시아 국제판화 비엔나레 / 한국 코미셔너
2013
- 단원미술대전 / 운영위원, 심사위원
- 서울-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조직위원회 / 집행위원장
2014
- 서울-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조직위원회 / 집행위원장
2017
- 러시아 국제판화 트리엔날 / 한국 코미셔너
2018
- 러시아 국제판화 트리엔날 / 국제심사위원장
- 제 34회무등미술대전전 / 심사위원장
2019
- 러시아 이르크츠크미술관, 한국판화전 / 큐레이터
- 제 35회 무등미술대전전 / 심사위원
2020
- 제 36회 무등미술대전 / 심사위원
- 2020 뮤지엄 SAN 제3회 판화 작가 공모전 / 심사위원
- 한국 현대판화 러시아 순회전 기획
2021
- 제 37회 무등미술대전 / 심사위원
- 2021 러시아 국제판화 트리엔날 / 한국 코미셔너
2022
- 2022 뮤지엄 SAN 제4회 판화 작가 공모전 / 심사위원
2022
- 2022 뮤지엄 SAN 제4회 판화 작가 공모전 / 심사위원
학회, 단체, 지역 사회
1999 - 2019
- 한국기초조형학회 / 이사, 운영위원
1990-2001
- 오리진 회화협회 / 운영위원 역임
1990-2019
- 한국현대판화가협회 / 부회장, 회장역임
1990-2019
- 한국미술협회 / 이사, 판화 분과위원장 역임
1990-2000
- 홍익판화가협회
1996-2000
- 송은문화재단 / 이사역임
1999-2009
- 을지학원,의료법인 / 이사역임
1999-2009
- 범석학술장학재단 / 감사
- 마중물 문화재단 / 발기인, 상임이사
- 경향신문사 / 언론자문위원 역임
- 밀알미술관 / 북한미술자문위원 역임
- 사단법인 이프 / 이사
- 세계문화교류연맹(WUCE) / 창설준비위원역임
- 서울시 문화재단 / 자문위원역임
- 서울-공간 국제판화 비엔나레 조직위원회 / 집행위원장 역임
- 한국판화미술 진흥회 / 자문위원 역임
- 한국일러스트아트학회 / 이사 역임
- 문신미술관 문신예술발전위원회 / 위원 역임